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문단 편집) === 러시아 제국군 장교 === 1891년, 만네르헤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후친위기사연대에 배속되었다. 황실친위대이니만큼 용모가 수려해야 했는데, 193cm에 달하는 장신의 덕을 보았다. 그 덕에 1896년에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코앞에서 직접 보기도 했다. 친위기사연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만네르헤임은 1897년부터 황실 마구간 관리 일을 맡으며 군마 전문가가 되었다. 1903년 교도대 대장으로 발령받아 기병연대 훈련소 승마교관이 되었다. 만네르헤임은 1892년 대모의 중매결혼으로 부유한 러시아 귀족 영애와 결혼했다. 부부는 슬하에 2녀 1남을 낳았는데 막내인 아들은 사산되었다. 만네르헤임은 1902년 별거했고, 1919년 이혼했다. 부자 아내와 갈라서자 당장 생활고가 닥쳐왔고,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궁핍으로 인한 우울증을 전장으로 도피하여 해결하고자 만네르헤임은 자원 참전했다. 1905년 [[봉천 전투]]에서 공을 세운 만네르헤임은 대령으로 승진했다. 한편 만네르헤임이 지구 반대편에 가 있는 동안 [[핀란드]]에서는 1905년 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만네르헤임은 조국의 그런 사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복귀하자마자 [[청나라]]에 대한 첩보임무를 받아 [[투르키스탄]]을 거쳐 [[베이징]]까지 가는 답사여행길에 올랐다. 만네르헤임이 [[카스피해]]에서 [[중국]]행 열차를 타는 동안 혁명을 일으킨 핀란드 민중들은 세계 최초의 완전한(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모두 부여) 여성참정권을 포함한 의회제도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만네르헤임은 [[시안시|시안]], [[정저우]], [[카이펑]]을 거쳤다가 [[불교]] 성산 [[우타이산|오대산]]에서 [[달라이 라마 13세]]를 만났다. 그 뒤 [[내몽골]]에서 만네르헤임은 [[한족]]들이 [[몽골인]]의 방목지를 잠식하고 있어 몽골인들 사이에 불만이 심각함을 보고했다. 만네르헤임은 러시아 군부에 올리는 보고서에서 [[동튀르키스탄]]을 중국과 "거래대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지역이라고 말했다. 1909년 러시아로 귀환한 만네르헤임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소장으로 진급해 별을 달았다. 그 뒤 [[바르샤바]] 주둔 황제경호근위창기병연대 연대장, 황실수행단, 독립친위기병여단장 등 요직을 돌았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만네르헤임은 근위기병여단장이었으며, 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싸웠다. 1914년 12월, 만네르헤임은 용전분투의 상으로 4등급 성 게오르기우스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을 받은 만네르헤임은 "이제 편히 죽을 수 있겠다"며 매우 만족해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